주말이라 이제 경제관련 뉴스도 좀 그만보고 좀 놀려고 그러다가 블로그에 올릴 것도 마땅찮고 좀 쉬려다가 intellectual wanderlust의 진화론 떡밥 을 보고 한 번 물어 봅니다. 원래 프레시안에 올라온 김지하의 글 을 읽고 언젠가는 한 번 써 보려고 했었죠. 옛날에 김지하시인을 (쪼끔) 좋아했었기 때문에, 위 글을 읽고는 드디어 노망났구나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일단 그 이야기부터 합니다. 김지하시인의 주장을 한 마디로 하자면,
내가 원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원효가 쓴 통섭이라는 말을 어떻게 싸가지 없는 사회진화론자(라고 읽고 국가사회주의자 내지는 나찌라고 읽습니다)인 에드워드 윌슨이 쓴 말을 번역하는 데 쓰냐? 증말 싸가지 없게. 두고 보겠어.
사실 진화론이 인문학(요즘은 이런 말을 많이 쓰더군요)에서 인기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자연과학자들이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죠. 인문학자들 중에서 앞장서서 다윈주의를 수용하였던 사람들이 남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맑스주의자와 나치주의자) 인문학에서 자연도태된거죠. 그리고, 요즘도 다윈주의를 이야기하면 약간 색안경을 끼고 보구요. 대표적인 예가 intellectual wunderlust에서 인용한 적자생존에 대한 오해죠.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개념에 따르면 기득권 세력은 경쟁에서 살아남은 적자이기 때문에 잘 사는 것이다. 억울하면 너희도 경쟁에서 살아남던가.
여기에 대해서 적자생존이 당위명제가 아니라 존재명제라는 그러니까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이야기도 약간 진화가 덜된 인문학의 주장을 반론으로 제시하는거죠… 제가 보기에는…
실제로 적자생존의 문제는 두가지가 있는데요, 첫째는 이게 순환논법으로 보인다는거죠. 그러니까 앞에 생략된 말을 추가하자면 이 말은 “(생존에 적합한) 존재가 생존한다”는 이야기로써, 마치 “결혼을 안한 사람은 총각이다”는 말처럼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우리에게 어떤 추가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그러니까 틀릴 수가 없는) 연역명제라는 비판이죠.
둘째 비판은 나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아리아족이 우월하니까 유태인은 그냥 까버려도 된다는 식의 이야기인건데요…
이런 주장에 대해서 좀 더 세련된(그러니까 좀 더 진화한) 논리는 바로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이야기한 주장이죠. 그것은 바로, 이렇게 생존에 적합해서 생존하는 주체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서 (인간에 국한해서 이야기하자면) 개인이냐, 인종이나 종족이냐 또는 인류 전체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윈이 적절한 대답을 해 주지 않고 그냥 생존하지 못했다는거죠. 그리고 리처드 도킨스는 이런 생존의 주체가 바로 유전자라고 합니다.
We have now arrived back at the point we left at the end of Chapter 1. There we saw that selfishness is to be expected in any entity that deserves the title of a basic unit of natural selection. We saw that some people regard the species as the unit of natural selection, others the population or group within the species, and yet others the individual. I said that I preferred to think of the gene as the fundamental unit of natural selection, and therefore the fundamental unit of self-interest. What I have now done is to define the gene in such a way that I cannot really help being right! (The Selfish Gene, p. 33)
이게 두번째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답이 되는지는 너무 당연하죠.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사회진화론은 자연선택의 기본 단위가 종족 또는 인종이라고 생각한거죠. 그래서 이게 그런 애매한 애국주의의 근거가 되는거구요. 그러니까, 자연선택의 단위는 국가, 민종, 인종이니 개인은 그런 더 큰 단위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거죠.
이게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답이 되는지는 좀 더 까다로운데요… 이 말에 대답하자면, 생존을 규정해야 합니다. 이 말에 대답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유전자가 생존한다”는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쪼금 궁금하긴 하죠.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Darwin’s ‘survival of the fittest’ is really a special case of a more general law of survival of the stable. The universe is populated by stable things. A stable thing is a collection of atoms that is permanent enough or common enough to deserve a name. (p. 12)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진화론이나 적자생존이나 그런 이야기는 결국은 앞에서도 말했던 엔트로피의 특수한(생물학적인) 경우가 되는건가요?
어차피 머리 열나게 RPM 굴려봐야 뚜렷한 대답도 없는 골치아픈 경제 문제는 좀 접어두고 좀 즐거운 지적 유희에는 진화론만한 떡밥이 없는 것 같습니다. ^^
추: 그러니까 결론은 위에 링크된 유시민의 비디오는 보지도 않았지만(시간의 압박) 다윈주의적 애국주의는 (진화가 덜된) 19세기 다윈주의의 산물이라는 거죠.
